2026.11.03
[INSIGHT] 김동호 이사 부산 건축기행 vol.1 시간을 쌓는 건축
Read More새벽 4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다시 잠을 청해 보았지만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설렘과 걱정,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 이번 부산 건축기행은 조금 특별했다. 한국실내건축가협회(KOSID) 이사로서 동료 이사들과 함께 기획한 주말 답사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준비한 일정을 따라가는 여행과는 달랐다. 방문할 건축물과 공간을 조사하는 일부터 교통편, 숙소, 식사 장소까지 챙겨야 할 것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으니 크게 힘들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준비 과정에 참여해 보니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하나의 행사가 무사히 진행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고민과 수고가 필요한지 새삼 느꼈다. 서울역에서 KTX에 올랐다. 동료 이사들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모여 마지막 일정을 점검했다. 열차는 예정대로 남쪽을 향해 달렸고, 우리는 울산 통도사역에 도착했다. 통도사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비로소 여행이 시작된다는 실감이 났다.
이번 이틀 동안 만나게 될 건축물들은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①통도사ㅣ 자연과 시간이 쌓인 자리

첫 번째 목적지는 통도사였다. 사찰에 들어서자 전각과 함께 주변의 산세와 숲, 길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건축물만 따로 바라보기보다 그것이 놓인 자리와 주변의 풍경을 함께 보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 자연과 함께해 온 공간에는 새롭게 지은 건축물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개방형 수장고에서는 불교 미술과 문화유산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유물을 보존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유물을 어떻게 보여 주고, 관람객들이 어떤 순서로 경험하게 할 것인가. 수장고를 둘러보며 건축이란 공간을 만드는 일뿐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②PDM Partners 사옥ㅣ20년의 시간을 앞서간 건축

부산에 도착해 처음 방문한 곳은 PDM Partners 사옥이었다. 고성호 건축가는 이 건물이 약 20년 전에 준공되었다고 소개했다.
고성호 건축가에게 들은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그는 건축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한 걸음씩 경력을 쌓아 왔다. IMF 외환위기 속에서도 회사를 직원에게 맡긴 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특히 ‘지역 업체가 살아야 도시도 산다’는 믿음으로 호텔 건축주를 매일같이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는 대목에 깊이 공감했다. 그렇게 붙잡은 기회를 끝내 성과로 바꿔 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늘의 PDM Partners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회사가 아님을 알 것 같았다. 설명을 들으며 건축물을 찬찬히 둘러보니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건물의 향과 축, 주변 조경과의 관계, 공간을 구성하는 세부 디테일까지 어느 하나 가볍게 지나칠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금의 시선으로 보기에 충분히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건축물이었다.
좋은 건축은 유행을 따라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대의 감각을 담아내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욱 또렷해지는 건축이 있다. 이곳이 바로 그런 공간처럼 느껴졌다.

고성호 건축가의 설명을 들으며 건축과 경영에 관한 그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였다. 건축물의 외형이나 마감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고민과 판단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은 결국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 선택에는 건축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삶의 태도가 반영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건축을 업으로 삼고 오랫동안 실무를 해왔지만, 다른 건축가의 작품을 마주할 때면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 내가 익숙하게 여겼던 기준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판단에도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어쩌면 건축기행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런 순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성호 건축가의 발표가 끝나고 다음 방문지인 F1963으로 이동하려던 때였다. 부회장님께서 갑자기 내게 F1963에 대해 이 자리에서 설명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방금까지 베테랑 건축가의 깊이 있는 설명을 들은 직후였기에, 그다음 순서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적지 않았다. 준비한 내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건축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른 분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공부한 내용을 나누고 나를 알릴 기회를 얻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부담보다는 준비한 내용을 진솔하게 전달해 보자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의 긴장감도 이번 기행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 중 하나다. 준비된 지식과 현장에서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은 서로 다르다. 건축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F1963은 이번 건축기행에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공간이다. 방문에 앞서 조병수 건축가의 작품과 건축 철학을 찾아보았다. 이전까지는 자연을 건축의 중요한 모티브로 삼고, 현대자동차그룹과 관련된 프로젝트에도 참여한 건축가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료와 영상을 찾아볼수록 그가 건축을 바라보는 관점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깊고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키워드를 정리했다. 땅과의 관계, 비움과 재료의 표현, 그리고 경험과 인식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나름의 해석이었지만, F1963을 직접 걸으며 그 의미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땅과의 관계다. 건축은 땅 위에 건물을 세우는 행위이지만, 좋은 건축은 단순히 땅을 점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땅의 형태와 흐름, 주변의 자연과 장소가 지닌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는다. 때로는 새로운 형태를 강하게 드러내기보다 주변 환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지난해 일본 건축기행에서 만났던 스오 타카유키의 야시마루 전망대가 떠올랐다. 산의 지형과 주변 풍경에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그곳에서는 인간이 만든 건축물도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럼에도 건축이 자연을 지배하거나 압도하지 않고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공간은 내게 비슷한 울림을 주었다.
두 번째는 비움과 재료의 표현이다. 공간을 계획하다 보면 무엇인가를 더하고 채우는 일이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F1963은 덜어내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곳은 과거 고려제강의 와이어 공장이었던 산업시설을 문화공간으로 재생한 곳이다. 기존 건축물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마감으로 덮기보다, 남겨 둘 가치가 있는 요소를 살리고 새로운 기능을 더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변화시켰다. 기존 구조와 재료가 지닌 시간의 흔적은 그 자체로 공간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대신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함께 존재하도록 하는 것. 그 안에는 재료를 바라보는 태도뿐 아니라 시간과 장소를 존중하는 건축가의 생각이 담겨 있었다.
세 번째는 경험과 인식이다. 공간은 도면이나 사진만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걸어 보고, 잠시 멈춰 서고, 앉아서 주변을 바라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F1963을 그렇게 걸으니 기존 산업시설의 흔적과 새로 구성된 동선, 문화 프로그램이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지, 어디까지 개입하고 어디서 물러설지 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쳤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실내건축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곳은 흥미로웠다. 새로운 마감과 집기로 공간을 채우는 일만큼, 기존 공간의 가치를 가리지 않도록 새 요소를 절제하는 일도 중요한 디자인이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 내며, 그 안에 어떤 경험을 담을 것인가. F1963은 그 질문을 내게 다시 던져 주었다.
④물푸레ㅣ자연을 닮은 저녁

하루의 마지막 일정은 고성호 건축가가 설계한 물푸레에서의 저녁 식사였다. 식사를 하러 들어서는 순간, 일반적인 레스토랑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화려한 마감재나 장식으로 시선을 끌기보다 건축물과 조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공간을 채우는 가구와 집기에서도 세심한 고민이 엿보였고, 재료가 지닌 질감과 분위기를 살린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상업공간을 계획할 때는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재료와 색상, 공간의 첫인상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물푸레에서는 공간을 돋보이게 하는 방법이 반드시 화려함에 있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건축물과 조경, 가구와 재료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무엇 하나 과하게 드러나지 않는데도 전체적인 인상은 선명했다. 공간이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도 달라지는 것 같다. 함께 식사하며 나누는 이야기와 음식의 맛까지도 그 공간의 분위기 속에서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건축은 사람을 담는 그릇이라고 흔히 말한다. 좋은 공간은 단순히 사람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의 감각과 기분에 영향을 주고,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까지 기억하게 만든다. 물푸레에서의 저녁은 그런 공간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한 시간이었다.
Photography Credits
PDM Partners 사옥, 물푸레 — 사진 제공: PDM Partners
에케(Ecke) — 사진 제공: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LAB 이흥용제과 —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yui017